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소네 야스히로 (문단 편집) == 성향 == 우익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로서 재임 기간 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한국과 중국의 지탄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극우 세력에게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인해 협박편지를 받은 적도 있다.(자세한 내용은 [[세키호타이 사건]] 문서 참고) 하지만 대체론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호한 시절을 보냈다. [[공화당(미국)|미국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1981년]] ~ [[1989년]])와 [[전두환 정부]]([[1980년]]~[[1988년]]) 시기와 정확히 겹치는 임기 때문에 전두환-레이건-나카소네의 한-미-일 삼국협력과 한-미 동맹, 한-일 협력관계의 전성기였다. 아울러 2차대전 참전, 방위청 장관으로 재직했던 경력을 살려서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도 적극 나섰다. 전후 처음으로 GNP 대비 1%를 넘어선 방위비의 책정,[* GNP 대비 1%는 1970년대에 [[미키 다케오]] 수상이 방위비 상한선의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 소련 위협에 맞서는 일본의 '불침 항공모함화', 해상교통로(SLOC) 1천해리 방어 등을 내세워 무기 도입을 대폭 확충한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일본이 도입한 무기들이 F-15J 요격기, 공고급 이지스함, 그리고 자국산 지원전투기(FSX. 이후 F-2 바이퍼 제로) 개발 등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군사강국 일본을 대표하는 주력으로 남아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47news.jp/PN2012010501000966.-.-.CI0003.jpg|width=100%]]}}}|| || 1983년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 나카소네에게 수교훈장 광화대장을 수여했을 때의 모습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img.goo.ne.jp/bcd3e3022b4390642061ad30230f7124.jpg|width=100%]]}}}||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하는 모습.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론'과 '야스'라고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 특히 한일관계에서 진전을 보여, [[1983년]] 현직 일본 수상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 회담을 성사시킨 주요인물 중 하나로 [[세지마 류조]]가 있었다.], [[1984년]]에는 전두환이 답방함으로서 한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이건과 나카소네 인형은 갓 [[NLPDR]]이 자라나던 [[운동권|학생운동]] 시위에서 [[동네북]]처럼 규탄당하고 [[인형]]이 [[화형|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전두환도 나름대로는 명분이 있었다. 바로 [[반일]]이 아닌 "[[극일]]". [[환단고기]]를 강조하는 [[정훈교육]]이 이때부터 이뤄진 것도 그 맥락과 닿는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고령의 [[쇼와 덴노|히로히토]]는 방일한 전두환에게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식민지배에 대해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863|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미 나카소네 임기 말부터 무역마찰[* 당시 나카소네 자신이 TV방송에 출연하면서 외국제 상품을 사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국민 여러분들도 외국 제품을 사다 쓰세요"라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정작 국민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실, 일본 시장은 기존 브랜드 파워가 굉장히 막강하여 신규 진입자는 터무니 없는 고가 고성능/터무니 없는 저가품으로 승부를 내야 했다.]로 악화된 미일관계는 소원해지고, 미국의 [[데탕트]] 외교와 한국의 [[북방정책]]이 강화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도 이전보단 약해졌다. 일단 우익 성향이였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반공이라는 이념을 둘다 가진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스히로의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그리 나쁜편은 아니였다. 지금이였으면 엄청나게 욕을 먹었겠지만 그리고 당시에는 과거사 문제가 그리 부각되지도 않았으며 현실적으로 차관을 받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1982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 마찰이 없지 않음에도 배상과 사과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가 않았다. 다만 그와 별개로 한국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카소네 정부와는 별개로 일본매체나 일본 민간에서 선수들 숙소를 일본에 두자는 등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생각하면서 혐성질을 한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일본 보수정치인의 아이콘이며 한국의 거물급 정치인들과 두루 친분이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와도 돈독한 사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일본 정부 대표단 자격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와 함께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와도 관계가 돈독해 1990년 잠실 [[롯데월드 어드벤처]] 매직아일랜드 및 1997년 [[롯데호텔 부산]] 개장식에도 참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